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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씨네마

사람이 신을 대체할 수는 없다 - 영화『밀양』을 보고


 2009년 11월 4일 최종 수정.
 여름의 <인간과 종교> 수업에서 기본을 다지고, 다음 학기 <인문학 글쓰기>에서 피드백 및 지적을 받은 후 최종 수정했었음.

 이거랑 정반대되는 글을 오늘밤 내로 적어야할 것 같아서 간만에 찾아서 읽어봤는데, 하... 이 글을 썼을, 새내기 때의 느낌이나 생각들 하나하나가 새록새록 떠오르며 이땐 이랬었구나... 이 글 논리대로만 따라가자면 그래 말은 맞는 말이긴 한데.. 글 밖에서도 맞는 말일까? 와 같은 생각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런 류와 반대되는 글을 적으려했었는데 다시 읽고나니... 거참 난감하네
 새내기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많은 지점들에서 달라졌을까? 조금 있으면 완성될( 거라고 제발 믿어효.. 딜레이 며칠 째냐) 글과의 차이에서 드러날 수 있을까?








사람을 신이 대체할 수는 없다 - 영화 밀양을 보고

사회과학대학 사회과학계열 권준희

 

1. 들어가며

문득 길을 걸으며 주위를 둘러볼 때면 곧잘 경탄하곤 한다. 벤치에 앉아 혹은 어느 까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길을 걸으며 활기찬 대화를 주고받는 이들,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소신을 표현하며 애쓰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 하나하나에 녹아있을 자신들만의 내용과 맥락을 상상하다 보면 이내 경탄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내 그 삶들을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영화 밀양은 이처럼 사람들의 평범한 그렇지만 소중한 삶과는 달리, 수많은 고통에 치인 한 여자의 한없이 괴로운 이야기로만 읽힌다. 그렇지만 밀양은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 삶-고통 받고 그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가는-을 다룬 영화였다.

 

2. 고통과 신으로의 귀의, 그리고 다시 고통과 사람으로의 귀의

신애는 피아니스트의 꿈도, 남편의 바람으로 사랑의 꿈도 잃어버리고 끝내 사별의 고통까지 겪은,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과 크게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여자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이후 무작정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온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이다. 새로운 공간으로 내려온 신애는 서서히 밀양에서의 삶에 적응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돈 많은 서울 여자로 행세하는 바람에, 웅변학원장이 돈을 노리고 그녀의 아들 준을 납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별의 고통 이후 신애는 사실상 준 때문에 살아갔는데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제공해주는 버팀목이었던 준이 죽어버린 것이다. 또다시 고통을 겪은 그녀는 토하듯 운다. 한없이 절규한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없어졌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지 알 수 있었다. 아들을 잃은 고통에 빠져있는 신애에게 약사는 하나님을 얘기한다. “세상 모든 것에 주님의 뜻이 숨어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이 햇볕 속에도...”

 

한없이 실의에 빠져있던 신애는 교회에서의 부흥회를 계기로 독실한 신자가 된다. 마음의 평안을 찾아 간증도 하러 다닌다. 이제야 그의 기독교적 이름인 신애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 같다. 아들 준이라는 살아가는 이유를 잃고서 종교가 삶의 이유가 된 것이다. 홀로 있을 때 눈물을 흘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완전한 평안은 아니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허영의 삶을 시도한다. 제대로 거듭났음을 증명받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러 가겠다는 것이다. 그의 딸이 다른 학생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데서 알 수 있듯이 아직 완전한 용서는 못했으면서도 말이다.

 

신애는 교도소에서 다시금 극렬한 고통을 맛본다. 자신이 용서하러 갔더니 살인자는 하나님이 이미 용서를 했다며 일말의 미안한 감정조차 없이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애는 하나님에게서 배신을 느낀다. 어떻게 그리고 왜 엄마인 자신보다 먼저 하나님이 용서를 했느냐며 분개하는 것이다.[각주:1] 그녀는 종교라는 살아가는 이유를 잃고서 다시 방황 한다. 자신 안의 가식을 깨닫고서 원초적인 고통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고통과 용서라는 명제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임의적으로 만든 절대자 앞에서 한없이 작은 지를 느끼면서 인간이기에 안고 있는 상처와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각주:2] 그리고 하나님 덕에 고통을 잊었다는 자신의 말이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셨다는 살인자의 말이나 구세주 우리 하나님을 외치는 다른 신도들이나 모두 자신이 편하기 위해, 고통을 외면한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저항한다.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에게 보이냐고!” “난 너한테 안 져.”라며. 근엄한 장로의 위선을 드러내고자 하고, 예배의 자리에서 거짓말이야를 틀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사실상 자신들만을 위한 믿음을 과대포장하는 그들의 진실되지 못함을 자각하고 매스꺼워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살로까지 저항을 시도한다.

 

하지만 고통에 어찌할 줄 모르면서 끊임없이 저항하는 그녀는 다시금 살아가게 된다. 자살 시도 직후에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그녀의 말은 삶에 대한 본원적인 갈망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아들도, 신도 잃은 채 한없이 괴로워하는 그녀는 이제 무엇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가 밀양에 온 첫날부터 항상 곁에 있어준 종찬일 것 같다.

물론 아들의 실종 직후 종찬의 카센터까지 찾아간 신애는 아직 믿을 수 없음에 발걸음을 돌린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그녀에게 완전히 새로운 공간인 밀양에서 집을 찾아주겠다며 땅을 알아봐주겠다며 먼저 다가왔던 이도 종찬이고,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 화를 내며 덤벼드는 것도 종찬이다. 아들의 사망 신고라는 감내하기 어려운 일에도, 그 자리에서의 오열에서도, 이후 종교라는 새로운 삶을 찾은 것처럼 착각했을 때도 항상 신애의 옆에는 종찬이 있었다. 죽음과 같은 불가항력적 절망 앞에서 또다른 죽음으로 대응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보듬어준 것은 바로 종찬이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나와 다시금 머리를 자르기 위해 가위를 드는 그녀 앞에 웃으며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의 모습에서 종찬은 앞으로도 함께할 것임을, 둘은 그렇게 서로 함께하며 살아갈 것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삶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은 삶의 부산물로서 생길 수밖에 없고 피할 수 없다. 그 고통을 많은 이들은 그동안 신정론[각주:3]의 틀 안에서 합리화하며 종교에 귀의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정작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다. 결국 답은 사람이다. 종교가 사람을 완전히 대신해줄 수는 없다.

 

3. 결국 어디에나 존재하는 비밀의 볕(Secret Sunshine,밀양)은 신이 아닌 사람이다![각주:4]

결국 밀양을 통해 종교가 인간을 구원한다기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하고 살아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사가 말했듯이 신비의 신정론 하에서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순종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나 고통은 비가역적인 것으로 돌이킬 수 없다. 종교는 단지 그 죽음이나 고통이 다 이유가 있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사람들이 감사해야한다고 가르친다. 신정론에서는 죽음과 고통은 우리가 잘못했기에부여된 산물이고, ‘다 우리를 잘 되게 하기 위한축복의 과정이라 말한다. 또한 나중에 보상받을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통과의례의 하나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인다. 어릴 적부터 얼마 전까지 기독교인이었던 내가 겪은 예배 문화 속에서도 사람들은 항상 내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반성하며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그리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각각의 신정론이 모두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각주:5], 이는 명백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영화 속 신애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가슴 깊이 엄연히 남아 존재하는 것이다. 신은 결코 모든 것을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답이 될 수 있다. 종교보다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은 여러 경우에서 이는 드러난다.

우선, 나는 고등학교 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그것을 느꼈다. 선생님들과 재단의 변화를 싫어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학교의 불합리한 구조를 지속시켰다. 나는 그에 대해서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도전을 했다. 때로는 한없이 지치고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축복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믿음이 내겐 더욱 힘을 샘솟도록 도왔고 이는 내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음으로 영화 속 신애의 사례이다. 그녀는 아들 준을 잃은 이후 기도로 자신의 고통을 합리화하곤 했지만 죄인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그동안 스스로를 속여왔음을, 그 고통을 피해왔음을 깨닫는다. 아픔은 결코 오직 신만을 통해서는 치유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오히려 끝까지 헌신적으로 임한 종찬의 태도가 앞으로 신애의 삶에 더 도움이 되었음을 그리고 될 것임을 엔딩신은 암시한다. 불가항력적인 대상에 대한 내려놓음의 경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서로 다독이며 그렇게 또 살아갈 것임을, 서로 마주보는 미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부흥회나 기도회와 같은 신에 대한 의존만으로 상처의 극복은 가능하지 않다. 물론 마음의 안정이나 평안으로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그 종교가 어떤 결정적인 답을 내려준다고 확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과 종교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 인간이 만든 존재에 불과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지나치게 얽매여있는 듯하다고 나는 어렴풋이 믿어왔다. 신의 존재 여부를 확증할 수는 없다. 다만 신을 인간들이 과도하게 이용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종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따라서 사람들이 성인들의 말을 듣고 이해한 후 자기 스스로 삶의 운명을 헤쳐 나가면서 깨닫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수많은 종교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고 자신들의 종교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다. 이때 그 원동력이라는 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의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라고 나는 느꼈다. 식당에서 배식 받으면서 감사하다는 인사가 일하는 이들에게 웃음과 힘을 주었고, 전단지를 치우는 수위 아저씨에게 말을 걸어봄으로써 격려가 되었으며, 비록 모르는 사이라도 어떤 글에 대해 이메일을 통해 소통함으로써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과 같이 아주 작은 데서부터 말이다. 이처럼 작은 데서부터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은 나아가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농민들에게 힘을 주고, 빈곤철폐 현장활동으로 철거민들과 쫓겨날 위기에 처한 공업종사자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집회를 통해 투쟁을 하는 이들에게 하루하루를 견뎌가도록 하는 위안 그 이상의 힘이 되어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겪고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이다.

 

4. 나가며

결국 나 그리고 우리를 미처 모르는 사이 비밀스레 그렇지만 따스하게 비추는 볕, 밀양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람이다. 신애와 준이 밀양으로 처음 들어가는 날에도, 준의 주검이 발견된 그 날에도, 마지막으로 신애가 집에서 머리를 자르던 그 날에도 항상 따스한 햇볕이 있었듯이, 언제든지 사람은 그렇게 우리 주위를 비추며 있다. 비록 가끔은 지나친 따가움으로 다가올 지라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하고 살아나가는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서 이런 사랑도 있었다.’는 것은 분명 이러한 사람들 간의 사랑을 일컫는 것 일테다. 나 역시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찾고 그래서 더 긍정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는데 내가 한없이 사람에 대해 실망하게 될 때 이 영화를 다시금 찾아보면서 마음을 추슬러야겠다.

밀양이 어떤 곳이죠?” 라는 물음에 종찬은 답했다. “뭐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죠.” 그렇다. 우리 역시 신애처럼 처절한 고통에 시달리고 용서를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더라도 결국 사람에 의존해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1. 여기에는 자신의 하나님이 왜 살인자에게까지 너그러운지에 대한 불만과 왜 자신의 일에 하나님이 먼저 개입하는 지에 대한 불쾌함이 공존한다.첫번째 불만에서 신애의 믿음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에 국한되었음을, 두번째 불만에서 사실 엄마인 신애 역시 당사자 준을 대신할 수는 없음을 간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2. 신애는 처음에 용서하지 못했기에 맞고 있던 딸을 그냥 지나쳤고, 용서하지 못했기에 살인자를 면회한 후 충격에 빠졌으며, 용서하지 못했기에 퇴원 후 미장원에서 마주친 딸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이처럼 용서는 힘든 것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가르침이, 용서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의 용서가, 나약한 인간에겐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신은 악이나 화를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신은 바르고 의로운 것이라는 이론.(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4. 이하의 내용에서 ‘종교’는 특히 절대자 통해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변질된 기복신앙으로서 한국 기독교를 의미한다. 이는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도 아니고, 옳지 못한 성격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맥락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신정론은 착한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하고, 시련 극복에 실패한 이들의 삶을 놓치고 있다. 또한 신은 인간의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고난을 통해서만 신을 만나야하는가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신을 끌어들이지 않은 인정론이 대안이다와 같은 비판에 직면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