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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씨네마

우린 다른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 <피아니스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우린 다른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정치학과 
권준희 



“우울함이라는 친구야 늘 편재하니까 언제 곁에 스물스물 다가들어도 새삼스럴 거야 없다만...”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친구의 이 말이 이전 같았으면 그냥 엄살이라 치부하거나 흘려들었을 말이건만 가슴을 콕콕 찌르게 되었다. 영화 <피아니스트><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다르지 않았다. 오늘 한 친구가 내게 말하길, 올해 초에 내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본 후 원래 현실이 시궁창이긴 하더라도 너무 불쌍해보이더라~”라고 했다더라. 나는 불쌍해보이더라 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이전의 내가 이 영화를 그저 남의 이야기로 여겼다는 사실에 깜짝놀랐다. 이번 감상을 통해서는 지극히 사실적이고도 현실적인, 우리 주변 개개인의 그리고 바로 나의 이야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피아니스트>의 에리카는 이전 같았더라면 단순히 기괴하고 괴팍한 정신병을 지닌 주인공, 예술 영화 어려워 정도로 파악했을테지만 이번엔 끊임없는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그 연민이라는 것은 우리 주변의 많은 이들이 겉으로 멀쩡한 채 안간힘을 쓰며 서 있어도 그 안의 끝없는 나약함을 눈치 채게 되었을 때의 감정과 오버랩되는 데서 비롯됐다. 이 속에서 거리가 먼,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마츠코와 에리카는 어느새 내게 성큼 다가와있었다.

어느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이의 철저한 자아 붕괴

영화 <피아니스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피아노 교수 에리카의 차갑고도 냉철하며 위엄있는 모습을 한꺼풀 벗겼을 때 드러나는 불안한 자아를 잔인하리만치 파고들어 표현한다. 학생들 앞에서 근엄한 에리카의 바로 아래에는 페티쉬적 감성부터 온갖 끊임없는 상상과 욕망의 나래가 펼쳐져있지만 이를 사회적 명예, 경제적 필요에 의한 엄마의 압박 등 속에서 끊임없이 억누르고 이를 통해 하나의 안정적인 가면을 얻게 된다. 하지만 클레머라는 20대 젊은 청년과의 만남을 통해 에리카의 가면과 그 너머 모습 사이의 경계는 흔들리기 시작하고 끝내 건드렸을 때 존재 자체마저 위태해지는 것들마저 클레머에 의해 까발려짐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게 된다.

이 한없이 나약한 주인공은 어떻게든 외면적 자아를 위대하게 만들어야 하기에,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에 질투심에 피아노 제자의 손을 다치게 한다. 그녀가 클레머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우위에 서서 지시를 내리려 하는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소통할 줄 모르는, 오직 관음적인 시선으로 포르노 방에서 타인의 섹스만을 즐길 줄 아는 에리카는 때문에 절름발이이다. 외면은 완벽할지 몰라도 속은 결핍 투성이인 것이다. 관계가 진전될 기미가 보이던 클레머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에리카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에리카가 클레머에게 편지를 읽기를 바라는 모습에서 오히려 그녀를 존중하지 못하는 클레머가 원망스러웠지만, 이내 편지라는 것이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시간적인 차이나 상황적인 맥락에 대한 고려를 지운, 이기적인 시선에서 시작한 독백적이고도 일방향적인 소통의 상징일 수 있음을 떠올랐다.

일방향적이었기에 클레머의 에리카에 대한 이해 역시 엇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는 존재 자체가 역겹다는 크나큰 말로서 되돌아온다. “그래 네 말대로 대화를 했어야했어라던 에리카의 인정은 너무 뒤늦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서로의 몸을 탐하며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그리고 이해한단 말을 내뱉는 것은 그저 공허하게 흩뿌릴 뿐이다. 이미 엄마와의 관계에서도 일방향적인 말들의 산화만을 겪은 에리카는 뒤늦게나마 클레머와 교감을, 그리고 소통을 시도하려 애쓰지만 시간은 안타깝게도 엇나가 처음 편지대로 해주겠다는 클레머의 폭력 앞에 그저 허공을 무기력하게 응시하는 시선만 남을 뿐이다. 한없이 나약하기 그지없던,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에 의존하여 근근히 생을 이어오던 에리카는 결국 철저히 짓밟히고 붕괴된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의 끊임없는 몸부림

"꿈을 꾸는 건 자유다. 허나 그 꿈을 이루어 행복한 인생을 보낼 수 있는 녀석은 겨우 한줌뿐으로... 그러니까 그렇지 못한 그 외 무리들은 슬픈 한숨을 짓거나, 비참하게 술에 찌들거나, 급히 인생을 마치거나, 웃으며 넘기려 하거나, 마음이 비뚤어져 범죄에 뛰어들거나 한다. 어느 쪽으로 가도 앞은 캄캄하다."

 

참으로 쓰린 웃음을 짓게 만드는 오프닝 멘트는 꼬이고 꼬이는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더더욱 가슴을 쓰리게 만든다. 처음엔 그저 탄탄한 스토리의, 아름다운 색감의 좋은 영화 정도로만 여겨졌던 이 영화는 다시 봤을 때 너무나 사실적이고도 현실적인, 그런 슬픈 우리 삶의 단면들을 자세히 포착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아픈 동생에게 온 가족의 신경이 쏠려있느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마츠코는 음악 선생님이 되나 수학여행에서 벌어진 한 아이 류의 절도 사건을 무마시키려다 본인이 책임을 뒤집어쓰는 등 불행한 일의 연속 속에 끝내 사임을 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차례차례 버림받고 끝내 살인의 범죄까지 저지른다. 새 삶을 시작하려할 때마다 막다른 벽들에 계속해서 부딪히던 마츠코는 마지막 저택에서 이웃 그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의 삶의 영역에 들어놓으려 하지 않는, 상처 입은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우연히 마주친 옛 친구 메구미를 통해 겨우 다시 새 삶을 시작하려 하나 한 아이가 휘두른 야구방망이에 끝내 목숨을 잃고 만다.

처음에는 눈 모으고 혀를 내미는 마츠코의 이상한 행동을 그저 웃기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차츰 어릴 적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애정결핍에서 빚어지는 병리적 증상의 외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더더욱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마츠코는 관심과 애정을 받기 위해 이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질책과 같은 막다른 길들에 몰렸을 때 역시 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게 된다. 사랑받고픈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 뒤틀렸을 때 마츠코와 같아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츠코의 사랑받지 못함은, 홀로 있는 집에 돌아와서는 작은 목소리로 다녀왔다는 말을 매번 내뱉는 데서도 드러난다. 누군가 자신을 반겨줄 이를 찾고 있음은 그 밖에 류에게서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파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나, 차라리 맞고 죽더라도 외톨이, 혼자인 것보다는 낫다 등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이렇게 마츠코는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조카인 쇼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와 출소한 류가 뒤늦게 깨닫듯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준 마츠코의 일생의 가치가 두드러질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까지 셋이서 우주에 가는 것 등등을 상상하는 마츠코의 꿈은 눈물날 정도로 지극히 인간적인, 소박한 그것이었고 그녀의 기구한 삶은 결코 혐오스럽지 않은, 아니 혐오할 수 없는 생이었다.


절뚝거리는 자들의 향연
- 우린 다른 누군가의 세계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두 영화는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인물들을 통해 그 안에서 끊임없이 외로워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근근히 이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이가 있다면 <피아니스트>의 에리카는 애초에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이였다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했다 상처를 받는다는 점이다. 혹은 에리카 역시 이전에 여러 사랑을 했다 상처를 받았기에 더더욱 일방향적일 수도 있겠다. 아니, 혹은 마츠코 역시 잠깐의 일렁거림 혹은 외로움의 해소로서 사람을 만났지 서로를 고양시켜주는 차원의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엔 외로움도 크게 타지 않고, 평온하게 그리고 무던하게 잘 자라온 편이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한다.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마주하며 역으로 그 예민함과 감성적인 풍부함을 때때로 부러워하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같은 하늘을 보더라도, 같은 산을 보더라도,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더 많은 것을 한껏 느끼고 한껏 이를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음이 부럽곤 한다. 이렇게 끌어안을 줄 안다는 것은 곧 어떠한 미지의 것들이나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속에서도 당황치 않고 새로이 그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나마 그렇게 부러워하고 동경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들 속에서 '이게 뭔 놈의 그림이야'라 내뱉던 고흐 같은 이들의 그림은 '이 사람 눈엔 세계가 이렇게 보였겠구나'와 같은 생각으로 내 안에서 바뀌어졌다. 하지만 어찌됐건 이러한 마츠코나 에리카와 같이 타인의 일렁거림이나 흔들림을 보다 직접적으로 나의 삶으로까지 끌어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내 경계 안에 이들의 고민이나 모습이 용해되진 못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다. 조금은 외면화된 시선으로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왔던 것 같고 이러한 태도는 여전히 잔존해있다.

 

때문에 두 영화는 결코 즐겁지 아니했다. 오히려 불편하다. 답은 주지 않으면서 나의 세계관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그 흔한, 삶의 고통을 예술로 극복한다든지 다른 사람에 대한 의지로서 풀고 다시 살아간다든지 따위 없다. 아주 칙칙하기 짝이 없다. 그래,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폭넓은 의미의) 사랑을 하고 또 다시 상처를 받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두 영화를 보면 이 속에서 과연 다른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는 한걸까, 우리는 어디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걸까와 같은 의문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내면의 불안함 때문에 센 척을 하는 에리카나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마츠코나 모두 근본적으로는 타인에게서 이해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위안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상처를 입고 흔들리며 절뚝거리고 뒤뚱거리다 비극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이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대목은 결국 에리카나 마츠코 모두 누군가의 이해를 받았을 때 비로소 불행의 탈출구가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들은 짧게나마 웃을 수 있었고 행복의 가능성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어도 내겐 이 부분이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다가왔다. 우린 각각의 켜켜이 쌓인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바라보고 마주하고 보듬고 그대로 끌어안을 수 있는걸까?

<피아니스트>는 이 물음에 더욱 닫혀있다. 준비한 칼을 끝내 클레머에게 내비치지도 못한 채 자신의 가슴팍을 찌르는데 뭘 더 말하겠는가. 그저 관계에 있어 억압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의 비극을, 그리고 모든 관계로부터의 소외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는 영화 곳곳에서 험난한 마츠코의 인생과는 대비점으로서 계속해서 지나치게 화사한 꽃들이 화면에 자리한다. 이는, 까치발로 하늘에 닿자는 영화의 메인 노래와도 닿는 지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단순히 삶을 비관할 것이 아니라, 마츠코와 같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줌으로써 삶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어떠한 희망적 메시지를 숨겨놓고자 하는 듯하다. 중간의 감옥에서 “What is a life"라는 노래는 사랑의 힘과 가능성에 대해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 사랑의 힘을 믿을 수 있는걸까.

 

이해하고 있다던, 힘을 주고 있다던 이전까지의 생각에 대한 의심과 막막한 감정

영화들이 두렵고 불편해지는 지점은 바로 이런 데서 연유하는 것 같다. 결코 마주하기 쉽지 않은, 은폐되어 온 삶의 진실을 벗겨내는 것. 이를 두 눈으로 제대로 직시할 수 있으려면 꽤나 큰 심호흡과 마음의 준비와 손으론 어떻게 막고 이를 다지려면 어떤 모션을 취해야할지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야하건만, 아니 그렇게 해도 모자란데 한 번에 까발려버렸으니 그 앞에서 관객은 무력해진다.

새내기 때 영화 <밀양>을 보곤, 신이 아닌 인간에 대한 서로의 의지와 이를 통한 삶의 극복을 말했다. 나는 내 삶의 경험과 영화에서의 사례를 통해 사람을 통해 격려받고 위안받고 힘을 받으며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음을 말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넓은 의미의 사랑의 힘을 말했던 것이다. 그리곤 어디에나 존재하는 비밀의 볕(Secret Sunshine, 밀양)은 신이 아닌 사람이라며, 아래와 같은 지점까지 나아갔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다. 이때 그 원동력이라는 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 속의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라고 나는 느꼈다. 식당에서 배식 받으면서 감사하다는 인사가 일하는 이들에게 웃음과 힘을 주었고, 전단지를 치우는 수위 아저씨에게 말을 걸어봄으로써 격려가 되었으며, 비록 모르는 사이라도 어떤 글에 대해 이메일을 통해 소통함으로써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과 같이 아주 작은 데서부터 말이다. 이처럼 작은 데서부터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은 나아가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농민들에게 힘을 주고, 빈곤철폐 현장활동으로 철거민들과 쫓겨날 위기에 처한 공업종사자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집회를 통해 투쟁을 하는 이들에게 하루하루를 견뎌가도록 하는 위안 그 이상의 힘이 되어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겪고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잠깐의 웃음을 엿보며, 혹은 표정이 살짝 펴졌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지나친 자기만족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지금은 든다. 이들의 삶을 나는 이해했던가? 정녕 위로가 되어줬던가? 아니 위로가 되어준다는 발상 자체도 상당히 웃긴 게 아닌가? 나 스스로의 삶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당화를 해야하므로, 타인들의 삶을 이해한다며 멋대로 저미고 내 틀로 재단하고 그렇게 그저 자위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두 영화를 통해, 에리카와 마츠코의 억눌린 욕망들이나 숨겨진 이야기들이 서로 엮여 새로이 빚어내는 저만의 독특한 모습들을 보며, 이전까지 내가 타인의 삶들을 지나치게 쉽게 혹은 가벼이 여겼던 것은 아닌지, 때문에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섣불리 말해오진 않았는지와 같은 생각들이 크게 들었던 것 같았다. 때문에 그 삶이라는 것을, 그리고 서로를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는 있는건지 막막하고 이해하고 소통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너무 막막하다.
 

끝이 아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 조금은 진득한, 기다림의 필요성과 그 가능성

글이 조금 일찍 제출되었더라면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을 것 같다. 그저 막막함의 토로, 혹은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을,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지는 않은지와 같은 무력감에 끝을 맺고 허무해하고 허탈해하며 갑갑한 심정을 가지고 또 한 주를 살아갔을 것 같다.

 

다행히 오늘의 어떤 대화를 통해 이해라는 것이, 다가섬이란 것이, 간극을 좁히는 것이, 결국은 좀 더 진득하게,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닐까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친구는 자신이 어떠한 가치지향적인 공동체를 나온 이후로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전엔 의도치 않더라도 교류하고 의지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삶에 보다 개입하고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면, 이젠 그저 업무적인 관계로 맺어진 것들만 남아있어 마치 주어진 목표지점만을 찍고 돌아올 뿐, 보다 공동체적인 어떤 감정을 느끼기도 힘들고 가치도 공유하지 못한 채 이러한 답답함마저 서로 이야기하지 못함에 대해 말했다.

사실 들어보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더라. 나 역시 끊임없이 나를 바라봐주고 내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있다고 여겨지던 공동체로부터 벗어난 후,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 여기저기 발걸음을 하고 몸을 들이밀곤 했고, 그것이 비록 일적인, 사무적인 관계일지라도 무언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아등바등해왔다. 다만 이 친구와 다른 지점은 기대치가 한없이 낮아져있다는 것이었다. 새내기 때만 하더라도 각자의 검열이나 장벽의 턱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없이 내뱉으며 거기에 공감하거나 서로 웃고 떠들며 뭔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 같고 가까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이젠 누군가는 상처를 입은 경험 때문에 움츠러들어있고, 누군가는 특정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길 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자신을 더더욱 꼿꼿이 세우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마치 에리카나 마츠코처럼 말이다. 때문에 새로운 집단에서 함께 몇 번의 반복되는 술을 먹는 자리에서도 정작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성큼성큼 이전만큼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못 받더라도, 조금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 속에 조심히 혹은 차분히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았다. 기대치가 낮아졌거나 조금은 포기하는 법을 배운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에리카나 마츠코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을 엿볼 수 있었듯, 어떻게 그 많은 개개인의 슬픈 역사와 흔적과 트라우마 같은 것들을 한번에 일목요연하게 무슨 행동지침 내리듯이 쏟아낼 수 있겠는가. 당사자들이 이전의 기억들을 다시 마주하기까진 또 얼마나 많은 체력과 에너지가 소모되는가. 때문에 나는 각각의 사람들에게서 켜켜이 쌓인, 때로는 케묵은 것도 있고 때로는 갓 난 따끈따끈한 흠집도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그 수많은 맥락들과 흐름들이 교차해온 것들을 조금이나마 바라보고 마주하고 보듬고 이해하고 그렇게 끌어안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세계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불통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득하게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조금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하지 않냐는 것이다. 클레머가 에리카를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마츠코와 관계를 한 수많은 이들이 조금만 더 마츠코를 기다려 줄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기다리면서 보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서로를 이해하려 했더라면 어땠을까. 때문에 아직 삶을, 이해를, 그리고 소통을 완전히 비관할 수는 없지 않을까-라고 다시 자기 최면을, 그렇게 믿음을 만들어본다.




 
 영화 <피아니스트>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자유롭게 쓰는 글. <페미니즘 미학과 예술> 과제로 제출. 하.. 괜히 마주할 때마다 힘이 나지 않아 계속 회피하다 이제서야 글을 마무리 지음... !